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르바로사 작전 (문단 편집) === 소련의 내막 === 히틀러나 독일군부가 아무리 비밀을 감추려고 해도 이런 대규모 작전이 소련에게 포착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이 전쟁준비를 시작한 1940년 소련측도 계속 전쟁징후를 감지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 산재한 소련 간첩망은 1940년 가을부터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거니 대비해야 한다는 첩보를 계속 보냈다. 독일 내에는 히틀러 집권 전부터 수십만명의 공산당원이 존재했고 수백만명의 공산당 지지자들이 있었는데, 그 위성국들과 동맹국 내에도 상당수의 공산당 동조자들이 있었다. 독일 정부 내에도 신분을 위장한 [[간첩]]망이 엄연히 존재했다.[* 일제 스퇴베(Ilse Stöbe)라는 독일 외무부 직원은 소련 간첩으로 활동하면서 1940년 가을부터 독일이 1941년 5월에 침공할 것이라고 소련군 정보부인 [[GRU]]에 전달했다. 스퇴베는 1942년 독일의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들은 1년 전부터 계속 소련에 독일의 전쟁 준비 징후를 알려왔다. 특히 [[일본 제국]]에서 신문 기자로 위장하고 있었던 [[리하르트 조르게]]는 일본 주재 독일무관으로부터 들은 침공 몇 개월 전에 6월 22일이 개전일이라는 정보까지 알려왔었다. 공산주의에 동조적이었던 독일 인쇄업자는 한참 인쇄되고 있던 독일 점령군용 러시아어 회화집 한부를 빼돌려 소련 영사관에 전달했다. 여기에 1940년 가을부터 소련주재 독일 외교관들이 가족들을 대거 독일로 귀국시킨다는 이상정황도 포착되었다. 외국에서도 소련에 계속 경고를 했는데, 영국에서도 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이 대거 동부로 계속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소련에게 제공했으며, 스웨덴에서도 [[노르웨이]]로 들어가는 스웨덴 관할 케이블에서 독일의 암호통신을 감청하여 해독, 소련에 제공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부정하고 싶어했다. 스웨덴 건은 출처 부족으로 무시당했고 소련은 영국이 제공한 정보를 가지고 독일에게 항의했으나 독일은 "영국 공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이동배치하는 것이다"며 변명했고 그럴 듯한 변명에 스탈린은 이를 믿어버렸다. 왜냐하면 이때 나치 독일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벌려놓은 [[그리스 침공]]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리스랑 전쟁을 해야 했고, 여기에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친독정부가 붕괴하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유고까지 진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를 들어 독일측이 그럴듯하게 변명하자, 스탈린도 히틀러한테 그 이상 추궁할 수 없었다.--드물게 도움이 된 두체-- 물론 스탈린이 마지막까지 독일이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맞지만 스탈린도 나름 합리적 이유가 있었다. 아직 대영제국이 무너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영국과 그 식민지간의 항로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소련과 양면전을 벌이는 것은 [[아돌프 히틀러|천년에 한 번 나올 바보]]나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히틀러가 스탈린한테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고 한 이유가 1차대전때 독일이 양면전쟁을 벌이다 파멸한 것을 교훈삼아 소련과의 [[양면전쟁]]을 미리 막기 위해서였는데 이걸 모를리 없는 스탈린이 히틀러가 그토록 피하려 했던 양면전쟁을 또다시 벌일거라고 예상하기 힘들었다. 여기에 소련군 정보국인 [[GRU]] 국장인 [[필리프 골리코프]] 중장은 여러 경로로 독일군의 침공징후가 뚜렷했는데도, "영국이 있는데 설마 소련까지 침공하겠나"고 생각하던 스탈린에 동조하여 독일이 영국을 정복하기 전까지 독소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의 확증편향을 부채질한 골리코프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GRU 국장에서 해임된다. 하지만 골리코프는 보신의 달인으로, [[정치장교]] 출신이었음에도 고급 정치장교는 거의 100% 숙청되어 처형되던 [[대숙청]] 기간도 무사히 넘기고 승진했을 정도로 정치적 처신을 잘하는 군인었기 때문에, 이후의 여러 위기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남았다. 독소전 기간동안 별 전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포로심사 업무를 맡아서 부역자를 처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스탈린 사후에는 흐루쇼프 측에 붙어서 1956년 주코프 국방장관 실각에도 관여하는 등 여러가지로 정치군인의 행보를 보였고, 그 이후에도 영달을 누리다가 독소전쟁 당시 별다른 전공이 없음에도 1961년 소련 원수까지 올랐다. 다만 원수 진급 1년후인 1962년 은퇴하게 된다.] 특무부대 총수인 골리코프의 이런 결론은 스탈린을 안심시켰고, 스탈린은 히틀러가 측근들의 만류에도 대단히 무모한 도박을 행하는 벼랑 끝 전술에 이골이 난 인간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대영작전을 준비하기 위한 기만책일 뿐"이라는 독일의 해명을 믿게 된다. 다만 스탈린의 이런 확증편향에도 불구하고 [[세묜 티모셴코]] 국방장관이나 붉은 군대 총참모부[* 1940년 12월 이전에는 [[키릴 메레츠코프]] 대장, 이후에는 주코프 대장이 총참모장] 는 전쟁징후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1940년 12월 독일의 침략을 상정한 자체 도상연습을 실시했다. 청군(독일군)을 맡은 사람이 주코프 대장 (당시 키에프 군관구 사령관), 적군(소련군)을 맡은 사람이 파블로프 대장 (당시 서부 군관구 사령관)이었는데, 청군은 적군을 몇주만에 포위 섬멸하는 결과가 나왔다. 즉 소련군의 자체평가에서도 소련은 독일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소련군 수뇌부는 이런 소련군의 취약성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동부에 산재한 부대를 서부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다고 스탈린에게 상신했으나, 스탈린은 "우리가 부대를 서진시켜 국경부근에 집결시키면 독일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그럼 진짜 전쟁이야! 전쟁!"이라며 군부의 의견상신을 묵살했다.[* 이렇게까지 스탈린이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려고 한 이유는 스탈린의 공업화, 군 현대화 정책이 빠르면 1942년, 늦어도 1943년 안에 끝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붉은 군대 지휘부는 1941년 봄부터 계속 스탈린에게 경계령을 내려줄 것을 상신했으나 스탈린은 이것이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위와 같은 이유로 번번이 막았다. 결과적으로 침공당일인 1941년 6월 22일 0시 30분에서야 티모셴코와 주코프 명의의 경계령이 내려질 수 있었으나, 이때는 6.25때와 마찬가지로 일요일 새벽이었고, 농촌출신이 대부분인 붉은 군대의 장병은 농번기 휴가철을 맞아 상당수가 외출-휴가를 떠난 와중에서 이미 부대는 텅텅 비어 있었는데, 3시간 후에 독일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이는 초반 소련이 파죽지세로 독일군에게 점령당하는 요인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